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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가는 시간

히가시노 게이고 『악의』 : 줄거리, 등장인물, 배경, 도서평

by redbull-1 님의 블로그 2025. 6. 3.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악의' 책표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로, 치밀한 플롯과 탁월한 심리 묘사로 모든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악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96년 발표 이후 독자들과 평단 모두에게 강한 충격과 여운을 남긴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닌, 범인의 심리와 동기를 끊임없이 파고들며, '악'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서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미스터리 장르의 틀을 따르고 있지만, 그 다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과 관계의 복잡성을 묻는 진지한 성찰이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1.  줄거리 – “누가, 왜 그를 죽였는가?”

소설의 시작은 일본의 한적한 주택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입니다. 피해자는 인기 추리소설가인 히다카 구니히코.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앞두고 있었고, 결혼도 예정되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목이 졸린 채로 시체로 발견됩니다. 처음으로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그의 이웃이자 오랜 친구인 노노구치 오사무, 초등학교 교사였습니다.

사건은 형사 가가 교이치로가 맡게 되며, 그는 철저한 수사를 진행합니다. 초반부터 수상한 점이 속속 드러나며,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됩니다. 마침내 노노구치가 자백하면서 사건은 금세 해결되는 듯 보입니다. 그는 “히다카에게 무시당하고 창작물을 도용당해 분노를 참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가는 이 자백을 온전히 믿지 않습니다. 그는 노노구치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부분을 발견하고,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이후 독자는 가가 형사의 시점노노구치의 1인칭 기록이 번갈아 등장하는 구조 속에서 어느순간 집중하며 소설의 사건을 다층적으로 분석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노노구치가 남긴 일기와 초고, 진술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단순한 우발적 범죄나 질투가 아닙니다. 그는 철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히다카를 죽이고, 마치 감정적인 충돌로 인한 우발적 살인처럼 꾸밉니다. 이는 세상과 독자, 경찰을 동시에 속이기 위한 ‘지능적 악의’였습니다. 결국 가가는 그 거짓의 레이어를 벗기고, 그의 살인 동기가 단순한 열등감이나 분노가 아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인간의 깊은 악의임을 밝혀냅니다.

2. 등장인물 – “가면 뒤의 본성, 인간은 왜 악해지는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악의』에서 각 인물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특히 노노구치라는 인물은 범인이면서도 피해자처럼 묘사되며, 독자의 공감과 거부감을 동시에 유도합니다. 그 복합적인 감정은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됩니다.

-. 노노구치 오사무: 겉으로는 온화하고 친절한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작가가 되지 못한 채 교직에 안주했고, 과거 히다카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히다카가 그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작품을 썼다는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그는 점차 왜곡된 기억과 분노를 쌓아갑니다. 그는 자신의 무능을 외부 탓으로 돌리며 히다카를 ‘악’으로 설정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그의 일기 속 진술은 지적이고 치밀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독자는 ‘이 사람은 위험하다’는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 가가 교이치로: 히가시노 세계관에서 다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베테랑 형사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가는 탐정의 역할을 넘어서 인간 본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는 법과 논리를 넘어서 사람의 내면을 추적하고, 결국 노노구치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악의 본질을 폭로합니다. 그의 철학적 성찰은 이 작품을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닌, 인간 심리에 대한 탐사서로 만들어 줍니다.

-. 히다카 구니히코: 피해자로서의 존재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는 성공한 작가였고, 많은 팬을 거느린 유명 인사입니다. 그러나 노노구치의 시선 속 히다카는 잔인하고 교묘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실제로 히다카가 노노구치의 작품을 도용했는지는 독자에게 명확히 제시되지 않지만, 이 애매함은 인간의 기억과 감정이 얼마나 주관적인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3.  배경과 메시지 – “악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란다”

『악의』는 강렬한 사건이나 자극적인 설정 없이도 깊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냅니다. 작품의 배경은 전형적인 일본 중산층 주택가이며, 등장인물도 모두 평범해 보입니다. 그러나 히가시노는 바로 그 평범함 속에서 악의 씨앗이 자라고 증식하는 과정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가가는 말합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비롯된다.” 이 말처럼, 이 작품은 악을 거창하고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일상 속 감정의 틈에서 발생하는 작고도 무서운 흐름으로 보여줍니다.

이 소설이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악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쉽게 선과 악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현실에서 악은 매우 교묘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특히 노노구치의 자백과 일기를 통해 책을 접하며 집중하던 우리는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순간이 오고, 그 순간 자신 안의 어두운 감정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히가시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악의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냅니다.  또한, 『악의』는 “기억의 왜곡”과 “진실의 주관성”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진실은 다르게 보이며, 누군가에게는 피해였던 것이 다른 이에게는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단순히 누가 나쁜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스스로를 정당화한 적이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도서평

『악의』는 진정한 미스터리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것은 단지 ‘범인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읽는 내내 불편하고, 때로는 공감하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오래도록 마음을 붙드는 잔상이 남는 작품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악의』를 통해 말합니다. “악은 특별한 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안에도 있다”고. 그리고 그 메시지는 이 소설이 단순한 범죄소설을 넘어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