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조시현 작가의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작은 도시에서 서로의 삶에 스며들며 회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 섬세하고 서정적인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인물의 내면에는 깊은 파도가 이는 감정의 밀도를 정교하게 직조한 작품이다. 주인공 윤정은 서울에서 성공한 파티시에로 명성을 얻었지만, 어떤 큰 사건을 계기로 돌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 근처의 조용한 도시 ‘유란’으로 내려온다. 이 도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소도시의 풍경을 닮아 있어 독자에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소설은 윤정이 유란에 정착하며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고,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를 직면하며 치유되는 서사를 따라간다. 그는 마을의 작은 베이커리 ‘마르셀로’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그곳의 주인 혜연과 서서히 가까워진다. 처음엔 무표정하고 냉소적인 인상으로 그려지는 윤정이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은 감정들과 치유되지 못한 상처들이 얽혀 있다. 특히 제과라는 창작 행위를 통해 그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윤정 개인의 회복 서사뿐 아니라, 그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청소년 소미와의 관계를 통해 세대 간 공감과 성장의 의미도 함께 전한다. 소미는 겉으로는 반항적이지만 윤정과 마찬가지로 내면에 깊은 외로움과 갈증을 안고 있다. 그녀는 제과 수업을 통해 처음으로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게 되고, 윤정과의 관계는 선생과 제자의 틀을 넘어서 서로의 거울이 되어준다.
2. 주요 등장인물 분석
윤정은 이 소설의 중심이자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다. 한때는 유명한 파티시에였지만, 어느 사건을 계기로 정신적 붕괴를 겪고 유란으로 내려와 이름도 성도 감추고 살아간다. 그는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점차 자신의 트라우마와 대면하게 되고, 마침내 그것을 언어화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아간다. 윤정의 변화는 소설의 감정적 중심축을 이룬다.
혜연은 유란에서 마르셀로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여성으로, 겉보기엔 강하고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속내를 지닌 인물이다. 그녀 역시 과거의 상처를 품고 있으며, 윤정에게는 삶의 또 다른 방식과 태도를 보여주는 존재다. 특히 그녀의 삶의 방식은 윤정에게 ‘완벽’이 아닌 ‘충분함’이라는 개념을 가르쳐준다.
소미는 청소년기로서의 혼란과 상처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부모와의 갈등, 정체성의 혼란, 사회적 고립 등 복합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며, 윤정과의 만남을 통해 감정의 표현 방법을 배우고 진심을 나눌 줄 아는 아이로 성장한다. 그녀는 윤정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어린 시절의 자아’ 같은 존재로도 읽힌다.
정우는 윤정의 과거에 등장하는 인물로, 직접적으로는 소설에 많이 등장하지 않지만, 윤정의 내면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는 윤정에게 사랑과 배신, 회복과 분노를 동시에 안긴 존재로, 회상과 회피, 재구성되는 기억 속에서 조용히 등장한다. 윤정이 그를 떠올릴 때마다 감정이 극적으로 요동치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들이 어떤 과거를 공유했는지를 추측하게 만든다.
3. 작품의 공간과 시간적 배경
‘유란’이라는 공간은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감정의 무게가 더해진 공간이다. 작가는 이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또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사용한다. 유란은 대도시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갖고 있으며, 이 느린 시간은 윤정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데 필요한 템포를 제공한다.
계절의 변화 또한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들며 인물의 감정선을 부드럽게 드러낸다. 봄의 따뜻함 속에서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여름의 강렬한 햇살 속에서는 갈등이 폭발하며, 가을의 서늘함 속에서는 회상의 장면들이 떠오르고, 겨울의 고요함 속에서는 자기 고백과 진실된 대화가 이루어진다.
작품 곳곳에서 사용되는 제과 용어와 과정들은 단순한 설정을 넘어 인물의 감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다. 예를 들어 크림을 휘핑할 때의 미세한 온도와 속도 조절은, 인간 관계의 예민함을 반영하고, ‘크림의 무게를 재는’ 장면은 감정의 무게를 정량화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상징한다.
4. 도서평 및 작가의 문체 분석
조시현 작가는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에서 절제된 언어와 섬세한 묘사를 통해, 마치 한 장의 수채화를 그리듯 인물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의 문체는 시적이면서도 과장되지 않으며, 독자에게 여운을 주는 문장이 많다. 예를 들어 “감정은 크림처럼 가볍지만, 휘젓는 순간 무게를 가진다” 같은 표현은 단순한 상황 묘사를 넘어서, 독자에게 감정의 본질을 되새기게 만든다.
또한 작가는 직접적으로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기보다는, 행동과 주변 사물, 그리고 음식이라는 소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독자가 인물의 내면을 스스로 추론하게 만들며, 읽는 이로 하여금 더 깊은 몰입을 유도한다.
이 작품은 빠르게 사건이 전개되는 소설을 선호하는 독자보다는, 잔잔하지만 깊이 있는 감정선을 따라가는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더 적합하다. 조용히 곱씹으며 읽을수록 더 많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다. 또한 감정과 기억, 죄책감, 관계의 복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치유적이면서도 감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남긴다.
5. 총평 및 추천 이유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겪는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진지하게, 그러나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풀어낸 문학 작품이다.
이 책은 "인생의 무게란 과연 재어지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에 대한 답을 독자 스스로 찾게 만든다. 윤정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회피와 침묵, 분노와 화해, 그리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 감정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특히 제과라는 구체적인 소재와 감각적인 묘사는 이 소설만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낸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이라는 소재는 결코 가볍지 않은 감정들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그것을 함께 들어줄 누군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 작품은 조용히 이야기한다. 이 책은 감정적으로 지친 사람들, 관계에 회의적인 사람들, 혹은 자신을 잃어버린 느낌이 드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삶은 계속되고, 그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결국 모두가 무언가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간다는 보편적인 진실을 아름답게 담아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