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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의 『아이들의 집』 :줄거리, 등장인물, 배경, 도서평

by redbull-1 님의 블로그 2025. 6. 6.

정보라 작가의 '아이들의 집' 책표지.

 

정보라 작가의 『아이들의 집』은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존재와 기억, 그리고 문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독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고아원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이자 환상적인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억압당하고 사라진 존재들에 대한 기록이 정교하게 담겨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외면해온 진실을 어린이의 목소리, 침묵, 그리고 상상의 세계를 통해 되살려내며, 무거운 주제를 문학적으로 섬세하게 풀어내는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1. 줄거리 – 사라진 아이들의 목소리를 따라

『아이들의 집』은 어느 여성 화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서사를 전개합니다. 이 고아원은 단순히 보호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존재들이 강제로 수용되는 공간입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곳에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되며, 곧 이 공간이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세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사와 관리자들은 아이들을 보호하지 않고, 폭력과 방임은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사라지는 아이들에 대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황을 견뎌냅니다.

희숙은 냉철한 이성과 리더십으로 아이들 사이에 질서를 만들고, 성일은 벽에 그림을 그리며 현실을 거부합니다. 명희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하며, 서로 다른 방식의 저항을 상징합니다. '나'는 이들을 관찰하며 스스로의 감정과 기억을 내면 깊이 묻어둡니다.

시간이 흐른 후, 성인이 된 '나'는 폐허가 된 고아원을 다시 찾습니다. 건물은 무너지고, 흔적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친구들의 실종에 관한 단서들을 되짚으며, 결국 이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합니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단은 곧 이 소설 자체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아이들의 집』은 한 여성 생존자가 자신과 동료 아이들의 기억을 기록하고자 쓰는 ‘증언의 문학’인 것 같습니다.

2. 등장인물 – 이름 없는 존재들의 초상화

-.‘나’ (화자)
과거 고아원에서 살았던 생존자로, 이야기를 회상하며 과거를 복원합니다. 어릴 적 겪은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그것을 마주하고 기록함으로써 억눌린 기억을 해방시키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글쓰기는 자신을 위한 구원이자, 사라진 존재들을 위한 애도입니다.

-.희숙
아이들 가운데 가장 이성적이고 책임감 있는 인물입니다. 정해진 규칙과 현실을 따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깊은 분노와 슬픔을 품고 있으며, 아이들이 사라져도 체계적인 대응을 시도합니다. 그녀는 집단 내 질서의 수호자이자, 억압 속에서 가장 강인하게 저항하는 자입니다.

-.성일
내향적이고 말수가 적은 인물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묵묵히 행동으로 감내합니다. 그는 주로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지하 공간을 파며, 현실과 분리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려 합니다. 그의 행동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상징하며, 침묵의 힘을 대변합니다.

-.명희
감수성이 풍부하고 상상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며, 가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합니다. 그녀의 존재는 상상력의 힘, 그리고 문학이 가진 위로의 역할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결국 사라지며, 상상조차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씁쓸한 교훈을 남깁니다.

-.관리자들
대부분 이름 없이 등장하며, 권위적이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집합체로 묘사됩니다. 보호자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아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조장하는 존재입니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당시 국가와 제도, 어른들의 무관심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3. 배경과 상징 – ‘아이들의 집’이라는 폐쇄된 세계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고아원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억압과 망각을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1970~1980년대 한국에는 실제로 국가 정책에 따라 거리의 고아와 부랑자, 장애인, 혼혈아 등이 보호소라는 이름으로 수용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았습니다. 정보라 작가는 이러한 현실을 기반으로, ‘아이들의 집’을 집단적 망각의 공간으로 설정합니다.

작품 속 고아원은 외부와 단절된 세계로, 전화도, 편지도, 가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이름보다 번호로 불리고,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이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실종, 폭력, 침묵은 곧 한국 사회가 억눌러왔던 진실들의 은유입니다. 아이들이 만든 비밀통로, 규칙, 상상의 언어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최소한의 인간성 수호 장치입니다.

특히 아이들이 만들어낸 ‘가짜 신문’이나 ‘상상의 법정’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은밀한 저항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의 집』은 현실을 은폐하는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혁명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말하려 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4. 도서평 – 문학의 책임, 기억의 윤리

『아이들의 집』은 사회적 약자, 특히 아이들의 목소리를 문학적 언어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다루는 공포는 귀신이나 괴물이 아니라, 외면과 방관 속에 사라진 존재들입니다. 정보라 작가는 그들에게 다시 이름을 부여하고, 목소리를 주며,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임을 문학으로 수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작품의 문체는 차분하면서도 압도적입니다. 불필요한 감정적 서술을 배제하고, 사실을 중심으로 조용히 써 내려감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깊은 정서적 충격을 줍니다. 서사의 빈틈마다 삽입된 상징들은 책을 접하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석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며, 독서를 단순한 감상이 아닌 행위로 확장시킵니다. 이 소설은 ‘기억하는 자’와 ‘기억하지 않으려는 사회’의 대립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문학은 그 틈을 메우는 도구이며, 정보라는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아이들의 집』은 작고 연약했던 존재들의 삶을 조명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의무를 우리에게 전하는 듯 합니다.

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도는 이 작품은 단순히 감상적인 비극이 아니라, 역사와 기억, 사회와 책임이라는 큰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집』은 바로 그 기억의 시작점이자, 문학이 사회와 맞서는 방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