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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가는 시간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의 『가공범』

by redbull-1 님의 블로그 2025. 7. 31.

히가시노 게이고작가의 '가공범'책표지.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공범』은 인간 심리를 깊이 파헤친 독특한 구조의 범죄소설이다. 이 작품은 기존 추리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독자에게 반전을 통한 충격보다 내면을 흔드는 깊이를 선사한다. 줄거리, 등장인물, 배경, 도서평을 중심으로 『가공범』의 매력을 자세히 살펴보자.

1. 줄거리 – 범죄 그 자체보다 중요한 인간의 내면

『가공범』은 제목 그대로 “가공(架空)”의 범죄, 즉 존재하지 않는 범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소설은 평범한 회사원인 도가시 다카유키가 어느 날 우연히 시작한 장난 전화에서 비롯된다. 그는 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낯선 여성의 이름과 회사 정보를 기억하고, 그 여성을 가장한 협박 전화를 익명으로 걸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흥미로 시작된 장난이었지만, 전화의 상대인 후지이 미치요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며 이야기는 점점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도가시는 자신이 건 전화로 인해 미치요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에 빠진다. 그와 동시에 미치요 또한 이 ‘협박자’와의 통화를 통해 자신의 억눌린 감정과 내면을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두 사람의 심리적 교류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마치 서로가 서로의 허상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가듯, '가공의 관계'는 점차 실체를 띠기 시작한다. 결국 이 가공의 범죄가 현실의 비극으로 이어지면서, 독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2. 등장인물 – 낯선 타인이 마주한 진실

작품의 핵심 인물은 단 두 명이다. 첫 번째는 도가시 다카유키, 30대 중반의 평범한 회사원이다. 책임감도 없고 명확한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에게 ‘협박 전화’는 일종의 현실 도피이자 자극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화 상대의 반응을 통해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감정, 죄책감, 책임감 등을 마주하게 되고 변화한다.

두 번째는 후지이 미치요, 30대 여성으로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중간 관리자다. 겉보기에는 차분하고 냉정하지만, 내면에는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안고 있다. 낯선 협박자와의 전화 통화는 그녀에게 자극이 되었고, 그녀는 이 통화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버린다. 두 인물 모두 과거에 대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으며, ‘범죄’라는 가상의 연결 고리를 통해 서로의 내면에 접근해간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의 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내면을 심도 있게 조명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마치 복잡한 심리 퍼즐을 풀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3. 배경 – 도쿄의 일상, 그 속의 고립

『가공범』의 배경은 현대 일본의 도시, 주로 도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바쁜 일상과 무표정한 도시인의 삶 속에서 주인공들은 고립된 채 살아간다. 도시라는 공간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담아내면서도, 때로는 그들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아이러니한 장소로 기능한다.

히가시노는 이 배경을 활용해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외롭고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미치요는 하루 종일 전화 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외부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하고, 도가시는 유령처럼 도시를 부유하며 누군가의 반응을 통해 존재를 확인받으려 한다. 이러한 배경은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긴장과 더불어, 도시 속에서 잊혀진 개인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4. 도서평 – 반전을 넘어선 심리 묘사의 진수

『가공범』은 흔히 알고 있는 추리소설, 즉 ‘살인사건’과 ‘탐정’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히가시노 게이고는 ‘범죄를 향한 인간의 심리’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반전의 강도보다는 과정과 감정에 집중하며, 인간의 이면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작품의 강점은 단연 인물의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단 두 인물만으로 독자의 시선을 끝까지 끌고 가는 서사력은 히가시노의 내공을 입증한다. 또한, ‘가공’이라는 개념을 통해 ‘진짜와 가짜’, ‘현실과 허상’의 모호한 경계를 탐색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다소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전개는 매우 빠르고 몰입도가 높다. 독자는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만약 내가 그 상황이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 질문 자체가 독서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감정과 상황을 섬세하게 연결하며, '심리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의 깊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공범』은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닌, 인간 내면의 외로움, 자기부정, 그리고 존재에 대한 갈망을 담은 심리극이다. ‘존재하지 않는 범죄’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 ‘감정의 진실’이라는 본질에 도달하는 이 작품은, 독자에게 단순한 서스펜스를 넘어선 깊은 사색을 선물한다. ‘가공’이라는 단어가 실제보다 더 리얼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이 소설, 감정의 허상과 실체를 함께 경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