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간주나무』는 김해솔 작가가 세밀한 심리 묘사와 시적인 문장으로 완성한 성장 서사이자,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한 현대의 민속 설화 같은 작품입니다. 나무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이 소설은 단순한 성장담을 넘어, 기억과 상처, 유산과 화해에 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노간주나무’는 강한 생명력과 느린 성장의 상징으로서, 인물들의 삶과 내면, 그리고 대물림된 고통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줄거리 – 묻어둔 과거를 부르는 나무의 기억
주인공 ‘선우’는 도시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20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기억의 상당 부분을 지워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우는 어느 날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십여 년 만에 고향 마을 ‘문산’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났을 때는 중학생이었고, 그 이후 가족과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우는 오래전 외할머니 집 마당에 서 있던 노간주나무를 다시 마주합니다. 그 나무는 그녀의 어린 시절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만, 선우는 그 시절의 감정을 꺼내는 것조차 괴로워합니다. 그녀는 집 주변을 둘러보며 하나씩 기억의 조각을 맞춰나가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잊고 있었던 사건, 인물, 감정들이 조금씩 되살아납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선우가 자신의 유년 시절에 겪었던 가정폭력, 외할머니의 훈육, 엄마와의 단절, 그리고 그 안에서 자라나던 불안과 공허함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돌아온 고향에서 외할머니를 간병하며, 조용히 과거의 상처와 다시 마주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외할머니는 점점 말을 잃고, 몸조차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무언의 존재는 여전히 선우에게 말을 건넵니다. 특히, 노간주나무 아래에서의 한 장면은 외할머니가 선우에게 손을 내밀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선우는 그동안 오해했던 관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외할머니의 사랑은 투박했고, 때론 폭력적이었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보호’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렴풋이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선우는 문산을 떠나지 않고 머뭅니다. 그녀는 노간주나무 아래 작은 평상을 놓고,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는 곧 선우가 상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위에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선택을 했음을 상징하고 있는 듯 합니다.
2. 등장인물 – 말하지 못한 마음과 남겨진 사랑
-.선우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 도시에서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감정에 무뎌지고 관계에 거리를 두는 인물입니다. 어린 시절 가족 간의 단절과 상처를 경험하며, 그것을 의식적으로 지워버리며 살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며 과거와 마주하고, 자신과 가족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인물입니다.
-.외할머니
문산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강인한 여성. 감정 표현에 서툴고, 사랑보다 ‘훈육’을 앞세우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손녀 선우에게도 엄격했지만,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보호하려 했습니다. 후반부엔 말을 잃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큰 울림을 줍니다.
-.엄마(선우의 어머니)
가정폭력을 피해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온 인물. 그러나 자신의 상처조차 다 감당하지 못해 딸에게 제대로 된 애정을 주지 못합니다. 선우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지니고 있지만, 후반부에 서로의 고통을 알아가게 됩니다.
-.문산 마을 사람들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이들은 도시와 대비되는 공간으로, 때론 간섭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들이지만, 선우가 ‘일상’을 회복하는 데 있어 배경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말 한마디, 밥 한 끼의 풍경 속에 인간적 온기가 느껴집니다.
3. 배경 – ‘문산’, 기억이 숨은 곳
소설의 주된 무대는 경상도의 가상의 농촌 마을 ‘문산’입니다. 이곳은 김해솔 작가가 작품 속에 자주 등장시키는 공간으로, 기억과 뿌리,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문산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을 반영하고 또 반응하는 살아 있는 장소입니다.
노간주나무는 이 마을 중심부에 존재하며,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세대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기능합니다. 이 나무 아래에서 인물들은 기억을 떠올리고, 침묵으로 대화하며,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존재는 선우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감정’을 갖게 되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또한 문산의 일상적 풍경은 보통 새벽안개, 장독대, 논길, 장터, 제사상 등 잊힌 전통과 현재를 연결하는 시적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든 요소가 선우의 내면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도서평 – 침묵의 서사, 감정의 복원
『노간주나무』는 크게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조용히 귓가에 머무는 감정들을 한 줄 한 줄 끌어올립니다. 김해솔 작가는 단순한 감정 묘사나 자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물들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 ‘말하지 못한 것들’을 말하게 합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이 조용히 났다”, “오래도록 생각이 남는다”는 평을 남겼다고 했습니다. 이는 이 소설이 단순한 이야기 이상으로, 상처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족이라는 관계의 이면, 말과 침묵, 폭력과 사랑 사이의 흐릿한 경계에 대한 묘사가 탁월합니다. 김해솔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모든 상처는 증오로 끝나지 않으며, 시간은 기억을 왜곡하지만, 사랑은 결국 남는다”는 주제를 전하고 있는 듯 합니다.
문학평론가들은 『노간주나무』를 두고 “한국 농촌문학의 현대적 계승”, “침묵과 기억의 문학적 정제”라 평가하며, 김해솔 작가가 가진 고유한 서정성과 인간 이해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5.결론: 다시 뿌리내릴 수 있는 사람에게
『노간주나무』는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잊고 싶은 과거를 소환하는 작품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치유하는 시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잊었고, 어디에 뿌리내려야 하는가?”
노간주나무처럼, 천천히 자라고 깊이 뿌리내리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견뎌야 할 이유이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고 단단한 희망이 진짜 위로라는 것을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